[한비자]2-1 기회를 잃으면 나쁜 일이 찾아 든다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결단을 내리고 행동해야 할 운명을 지니고 살고 있다. 작은 일에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선택적인 결단 없이는 발전과 희망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보다 좋은 상태로 탈출하기를 원하면서도 아무 일도 일으키려 하지 않고 막연하게 현상(現狀)을 긍정하고 타성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현상유지파인 인간은 맞지도 않을 복권을 열심히 사듯이, 예기치 않은 요행을 기다리며 현실에서 과감한 결단을 피하려고 한다. 이것은 어떤 결단을 내림으로써 앞으로 닥쳐 올 변화가 두렵기 때문이다. 결단을 내리면 그 일이 좋은 방향으로 귀착될 것인가, 또는 불행하고 나쁜 방향으로 귀착될 것인가, 이런 결과론에 대한 공포로 인해서 우물쭈물 결단을 뒤로 미루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우유부단하여 좋은 기회가 찾아왔는데도 결단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커다란 재앙에 휩쓸리는 예가 많다.
한비자는 이런 실례를 여러 가지 소개하고 있다.
옛날 진(晋)나라의 공자 중이(重耳)가 헌공(獻公)의 애첩 여희(驪姬)의 권모를 두려워하여 나라밖으로 도망쳤다. 도망쳐 가던 도중 조(曹)나라를 지나게 되었다.
“진나라 공자를 보니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주군께서는 그를 후히 대접하여 은혜를 베풀어 놓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숙첨(叔瞻)이 이렇게 진언했지만 조나라의 공공(公)은 듣지 않았다.
더구나 중이의 늑골이 한 장의 널판자처럼 되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기형적인 늑골을 구경하기 위하여 공공은 중이를 목욕을 하게 하고 벌거벗은 몸을 훔쳐보았다. 희부기(負)와 숙첨이 이때 공공 옆에 있었다. 숙첨이 다시 진언한다.
“주군께서 이와 같이 무례한 처우를 중이에게 하였습니다. 그가 만일 기회를 얻어 고국으로 돌아 가 군사를 일으킨다면 반드시 우리 조나라의 화근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죽여버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공공은 이 진언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희부기는 그날 집으로 돌아가서도 우울했다. 그의 아내가 그런 남편의 표정을 보고 걱정되어 물었다.
“돌아오신 뒤 계속 우울한 표정이십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좋은 일이 있었더라도 그것이 내게 미치지 않으면 곧 나쁜 일이 닥쳐오는 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주군께서 진나라 공자님을 초정했는데 그 대우가 실로 무례했습니다. 그렇지 않아야 했는데 오늘 나도 그 장소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마음이 우울하여 견딜 수 없습니다.”
“저도 진나라 공자님을 뵈었지만 그는 1만 대의 전차를 갖춘 큰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분 같았습니다. 그리고 좌우에 거느린 분들도 그와 같은 큰 나라의 재상이 될 수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추방을 당하여 자기 나라를 떠난 사람이지만 지나가던 조나라에서 무례한 처우를 받았다면 그가 귀국한 뒤에는 반드시 무례를 저지른 사람의 책임을 추궁할 것입니다. 그런 때가 오면 조나라는 제일 먼저 죄를 문책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께서는 조나라의 공공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표시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소."
그리하여 희부기는 황금을 그릇에 가득 담고 맛있는 음식에 구슬까지 곁들여 밤중에 사자를 보내 공자에게 바쳤다. 공자는 사자를 만나 재배하고 음식을 받았지만 그 구슬은 사퇴했다.
얼마 후 공자는 조나라에서 초나라로 들어가고, 초나라에서 다시 진나라로 들어갔다. 진나라에 들어간 지 3년째, 진의 목공(穆公)이 군신을 모아 상의했다.
“옛날 진(晋)나라 헌공(獻公)은 나와 우정으로 맺어져 있었다. 이 사실은 모든 제후들이 알고 있다. 그 후 헌공은 불행히도 돌아가셨지만, 그럭저럭 헌공이 죽은 지도 10년이 된다. 헌공의 뒤를 이은 사람이 덕스럽지 못하여 그대로 두면 종묘의 청소도 하지 못하고 사직의 신은 제사도 받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머지않아 망하고 말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태를 보고만 있다는 것은 친구로서의 도에 어긋나는 일이다. 나는 중이를 도와 진으로 돌아가게 해주고 싶다. 여러분 생각은 어떤가?"
“좋은 생각이십니다.”
군신들은 모두 이렇게 찬성했다. 이렇게 하여 목공은 군사를 일으켰다.
전차 5백 여, 정예기병 2천, 보병 5만을 동원하여 중이를 도아 진나라로 쳐들어가 그를 진나라 군주로 삼았다.
중이는 즉위 한지 3년이 되자 군사를 일으켜 조나라를 쳤다. 그러는 동안 중이는 사자를 보내 조나라 공공에게 이렇게 전하였다.
“숙첨을 성에 매달아라. 그놈을 죽이고 그 시체를 모든 사람에게 본보기로 삼겠다."
한편 희부기에게는 이렇게 전하였다.
“우리 군사는 성에 육박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귀공이 나에게 배신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귀공이 살고 있는 거리의 문에 표시를 세워주기 바란다. 내가 명령하여 우리 군사가 귀공이 살고 있는 곳을 침범하지 않도록 하겠다"
조나라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모든 친척을 이끌고 희부기의 보호를 받기 위해 모여든 사람이 7백여 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하여 희비기가 살아남은 것은 중이를 예의로써 대우했기 때문이다.
출처: 웅비의 결단학, 월간 엔터프라이즈, 1986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