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의 처세훈 (웅비의 결단학)/상황판단의 지혜

[한비자] 3-3 양위도 칭찬할 가치가 없는 시대

고전 읽기 2023. 3. 1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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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위(讓位)도 칭찬할 가치가 없는 시대


한비자는 또 이렇게 말한다.


옛날에는 남자들이 밭을 갈지 않았다. 풀이나 나무의 열매로 충분히 먹고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들도 베를 짜지 않았다. 짐승가죽과 새털로 충분히 추위를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살 수가 있었고, 인간의 수가 적어서 재화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싸우지 않았다. 그러므로 많은 상을 주지 않고, 무거운 형벌을 도입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자연히 안정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의 수가 많아졌는데도 재화는 적으며, 힘들여 노동을 하여도 손에 들어오는 재화는 적은 형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서로 다투며, 상(賞)을 배로 주고, 벌을 엄하게 하여도 혼란을 막을 수 없다.


요(堯)가 천하의 왕이 되었을 때에는 지붕을 덮을 띠풀(茅草)도, 상수리나무 서까래도 맞추어 자르지 않았다. 희게 빵지 않은 곡식으로 지은 밥에 명아주나 콩 잎으로 끓인 국을 먹었다. 겨울에는 사슴 모피를 걸치고 여름에는 갈대로 엮은 옷을 입었다. 지금은 문지기가 먹는 음식과 옷일지라도 이처럼 비참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禹)가 천하의 왕이 되자 손수 가래와 괭이를 들고 신하보다 앞장서서 일했다. 피로하여 허벅다리 살이 빠지고, 정강이 털이 닳아 없어졌다. 지금은 노예의 노동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 사람이 왕위를 양위한 것은 문지기보다 못한 의식(衣食)을 버리고 노예보다 심한 노동으로부터 떠났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옛날 사람이 천하를 남에게 양보했다고 해서 특히 칭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현령(縣令)은 어느 날 갑자기 죽더라도 자손이 대대로 마차를 탈 수 있는 신분이 보장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리를 내놓는다는 점에서 보면 옛날 사람이 무척 간단하게 왕위를 물려준 반면에 지금 사람들이 현령의 자리도 좀처럼 내놓지 않으려는 것은 그 이익에 대소(大小)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산에 살며 계곡 아래 있는 내까지 내려가서 물을 길어오는 사람들은 서로 물을 나누어 준다. 낮은 땅에 살며 물의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사람을 고용하여 배수용(排水用) 도랑을 파게 한다. 그들은 흉년이 든 봄에는 어린 아이들에게도 음식을 나누어주지 못하지만 풍년이 든 가을에는 낯 모르는 손님에게도 식사를 대접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육친을 멀리하고 낯 모르는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식량이 많고 적음의 차이에서 오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옛날 사람이 재화에 집착하지 않은 것은 인간애가 깊었기 때문이 아니다. 재화가 많았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이 간단하게 천자(天子)의 자리를 물려준 것은 인격이 고결했기 때문이 아니다. 천자의 권세(權勢)가 적었기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이 관직을 탐내는 것은 그 품성이 저열해서가 아니다. 그것에 딸린 이익이 크기 때문이다.


 

출처: 웅비의 결단학, 월간 엔터프라이즈, 198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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