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의 처세훈 (웅비의 결단학)/욕망의 지혜

[한비자]7-1 인간이 지니는 위선의 가면

고전 읽기 2023. 4. 28. 22:00
728x90

 

인간이 지니는 위선의 가면


욕망이란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을 읽는다든지, TV를 본다든지 할 때 그 속의 주인공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나오면 꼭 한대 피우고 싶어지고 따라서 한대 피우지 않을 수 없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망은 그 사람의 내부에서 자연스레 솟아오른 것이 아니라 소설이나 TV드라마의 주인공에 의해 만 들어진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산업사회의 생산적 모든 제도는 투기심을 일으키게 하는 개인주의를 길러 내고 그 가면으로 덮여 있다고 이반 일리이치는 말했거니와 욕망이란 사회적으로 조성된 가면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꼼짝할 수 없이 그 가면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요즈음 유아성애자(乳兒性愛者)가 늘어나고 있으며 유아성 애자의 단체가 몇 개인가 생겨났다고 한다. 유아를 성애의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유치한 이야기이지만 이것 역시 이반 이리이치식으로 말한다면, 인간을 단일성(單一性)의 노동력으로 밖에 다루지 않는 산업사회의 가혹한 제도가 만들어 낸 하나의 가면, 하나의 도착(倒錯)인지도 모른다.

 

만약 도착이라고 한다면 그 원인이 되고 있는 장애가 제거되었을 때 인간은 정상적으로 복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분명히 그렇게 말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꼼짝없이 가면에 뒤집어 씌워진 개개의 인간에게 있어서의 일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을 것이다. 가면이건 무엇이건 욕망이란 어디까지나 개인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잘 생각해 보면 정상적인 욕망과 도착된 욕망, 진정한 욕망과 조작된 욕망, 선량한 욕망과 사악스러운 욕망, 아름다운 욕망과 추악한 욕망, 고급스러운 욕망과 저열한 욕망과 같은 구별이나 분류를 정말로 할 수 있을 까. 유아성애자를 도착이라고 단정하여 의심치 않는 우리도, 실은 사회적으로 조성된 다른 가면을 쓰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니까.


욕망이 가면이라고 하면 사람은 사회에 맞추어서 가면을 쓴다. 그러나 그 가면을 벗기고 보면 그 밑에서 나오는 것은 역시 가면일 것이 틀림없다. 아무리 벗겨간다 하더라도 마치 양파처럼 결국 가면밖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 생물인 인간에게는 아마 맨 모습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몇 겹이나 쌓인 가면이 있을 뿐인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가면이야말로 본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착된 욕망은 정상적인 욕망이며 정상적인 욕망은 도착된 욕망인 것이다.


죽인 자와 죽은 자의 욕망


‘그들은, 모든 것은 두 면이 있으며 진실한 것은 다른 쪽, 즉 하늘 위의 것으로 상상했다. 또 우리의 행위는 역(逆)의 그림자를 투사하는 것이라고 상상했다. 즉 이쪽이 눈을 뜨고 있으면 저쪽은 잠을 자고 있고, 이쪽이 간음을 하면 저쪽은 정숙하며, 이쪽이 훔치면 저쪽은 인심이 좋다는 식이다. 우리가 죽을 때 비로소 이 또 하나와 합체(體)하여 그가 될 것이다'라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말하고 있다.


혹시 어쩌면 남을 죽이고자 하는 욕망마저도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와의 공통적인 욕망일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죽인 자는 죽임을 당한 자와 동일 인물이며, 진정으로 동일 인물로서 합체되고자 하는 욕망이 살인이라는 행위를 불러일으킨, 살인이라는 행위에 의해서 비로소, 실은 한 사람인, 겉보기만의 두 사람이 합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인 자는 죽임을 당한 자이다. 

 

죽인 자는 먼 데서 부르는 또 한 사람의 소리에 이끌려 살인이라는 공동행위를 수행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 아닌가.


출처: 웅비의 결단학, 월간 엔터프라이즈, 1986년 12월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