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 0-3. 엄한 법으로 국력을 키워라
엄한 법으로 국력을 키워라
전국시대로 들어오면서 오랫동안 강국으로 군림해 오던 중원(中原)의 진(晋) 나라와 산동(山東)의 제(齊) 나라가 그들의 신하에게 임금 자리를 빼앗겼고, 오랜 전통을 지닌 작은 제후국들은 강한 나라에 병합되어 갔다.
거대한 진(晋) 나라가 한(韓), 조(趙), 위(魏)의 세 나라로 갈라지고 나머지 중국 땅을 진(秦), 초(楚), 연(燕), 제(齊)의 네 나라가 차지하였다. 이들을 역사가들은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부르고 이 전국칠웅이 2백 년 동안의 전국시대에 각축전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들 중에서도 진(秦) 나라 효공은 죄(罪)의 연좌제를 채용하고 부국강병책을 채용하면서 이들 전국칠웅 중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진나라는 일찍부터 법치주의를 채용하여 새로 확장한 토지를 직할지로 하고, 이 직할지를 군(郡), 현(縣)이라고 부르며 중앙집권적인 정치를 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법치주의와 중앙집권주의는 진나라를 다른 나라보다 앞서가는 강대국으로 만들어 주었고, 진나라가 뛰어난 강국이 되자 칠웅의 상쟁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어 오던 세력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생겨난 것이 이른바 종횡가(縱橫家)이다. 소진(蘇秦)이란 사람이 진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나라를 돌아다니며 임금을 만나 설득하여 이 여섯 나라가 힘을 합쳐 진나라에 대항하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론을 설파하였다. 여섯 나라들은 소진의 말에 따라 서로 싸우지 않고 강대국 진나라에 대항하기 위하여 힘을 모았다. 이 소진의 술책을 합종책(合)이라고 중국 역사에서는 말한다.
그러자 진나라에서도 가만있지 않았다. 장의(張儀)라는 사람은 소진과 반대되는 이론을 여섯 나라를 돌아다니며 설파하여 합종책에 의한 결속을 와해시켰다. 장의의 주장은 강한 진나라와 손을 잡아야 나라를 오래도록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중국 역사에서는 연횡책(連衡策)이라고 한다.
이 장의의 연횡책에 의한 외교의 도움으로 진나라는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을 써서 여섯 나라를 하나하나 멸망시키고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였다.
한비자의 나라인 한(韓) 나라는 이들 전국칠웅 중에서 가장 작고 약한 나라였다. 나라 땅이 작은 데다 서쪽은 진나라, 동쪽은 제나라, 북쪽은 위나라, 남쪽은 초나라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처럼 작은 나라가 여러 강한 나라 틈에 끼어 있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진나라가 나머지 여섯 나라와 싸움을 할 때면 한나라가 가장 먼저 피해를 입었고, 여섯 나라가 연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할 때는 그 선봉이 되어야 했다.
한나라로서는 합종책을 따르든 연횡책을 따르든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한나라의 어려움은 한비자의 『존한편(存韓篇)』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 존한편에는 한나라는 지금껏 진나라를 섬겨왔으니 제발 멸망시키지 말아 달라는 한비자의 말이 실려 있다.
"한나라가 진나라를 섬겨온지 삼십여 년 동안, 나아가서는 방패가 되어주고 들어와서는 깔개가 되어주어 왔습니다. 진나라가 날랜 군사를 내어 남의 나라 땅을 빼앗을 때는 한나라는 이를 도와서 한나라에 대한 천하의 원한을 감수하였고 그 공로는 강한 진나라에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한나라는 공물(貢物)을 바쳤으니 나라가 아니라 진나라의 한 고을과 다름이 없습니다.…"[1]
진시황에게 이렇게 말하는 한비자의 비참한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처럼 한나라의 어려운 현실을 앞에 두고 고심한 한비자는, 합종책이나 연횡책이나 모두 나라를 구하는 방법은 되지 못하며 (오두편), 약한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엄한 법으로 백성들을 다스리어 나라의 모든 힘을 외곬으로 동원함으로써 부강하게 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처럼 한비자의 법가사상은 전국시대의 혼란과 한나라의 어려운 처지를 배경으로 발전한 것이다.
출처: 웅비의 결단학, 월간 엔터프라이즈, 1986년 12월
[1] 韓事秦三十餘年,出則爲扞蔽,入則爲蓆薦。秦特出銳師取地而韓隨之,怨懸於天下,功歸於强秦。且夫韓入貢職,與郡縣無異也。... , 韓非子/存韓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wikisourc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