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힘을 과시하지 말라
'사랑. 그것은 사랑을 훨씬 넘어선다'라고 프랑스의 시인은 말했다. 그렇다. 사랑은 분명히 좋은 것이다. 사랑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넘어서서 발전해 가 는 것이다.
약간 구문에 속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오로지 그 사랑만으로 이미 식물인간이 되어 있던 남편의 의식을 되찾게 한 마음 착한 어느 부인 얘기를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사랑은 가끔 기적을 낳는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으로 생각해 버린다는 것은 잘못이다.
가령 초일류 기업에 근무하고 있던 여사원이 오랜 연애를 한 끝에 결혼을 하게 되고 아이를 낳은 다음, 비로소 주위를 둘러보니, 사내(社內) 결혼을 한 동기생 여사원은 호화로운 저택에서 우아하게 살고 있는데, 좁고 지저분한 셋집에 살고 있는 자신의 신세와 비교해 보니 마치 하늘과 땅과의 차이라 할 수 있었다. 보너스만으로도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자기 남편의 1년분의 수입을 훨씬 웃도는 정도이다. 앞으로는 ‘새로 집을 지었다’ ‘해외여행을 다녀왔다’는 얘기를 듣게 될 때마다 비참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불평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데 익숙해진 현대인의 비극의 표현일는지 모르지만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남편과 결혼한, 원래 초일류 기업에 근무했던 여 사무원의 심중에는 그때의 사랑이다, 연애하던 기분은 사라지고 사랑도 계량(計量)이 가능한 금액으로서 명기되어 있을지 모른다.
최근에 볼 수 있는 높은 이혼율은,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라는 사랑의 소 멸을 여실히 얘기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그 사랑에 의해 남편의 의식을 소생시킨 마음씨 착한 부인의 얘기가 뉴스로서의 가치를 갖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랑은 이미 거의 사라져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도 나도 부르짖는 애국심, 특히 고관대작이나 일류 기업가들일수록 앞장서서 애국심을 부르짖는다. 하기야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좋은 일일런지 모른다. 그런데 애국심을 부르짖는, 더구나 큰 소리로 부르짖는 그들이 뒷구석으로는 부정을 저지르고 탈세를 일삼는다. 이런 짓은 애국이 아니고 애기(愛己)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애기는 이미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욕망이라고 해야 하며 애국심의 제창은 그 이기적인 욕망을 감추기 위한 가면이었는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시인이 지적한 바와 같이 사랑은 분명히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은 항상 사랑을 넘어서서 얼마 후에는 사라져 버리는 것인가 보다. 남는 것은 경제적인 수지계산과 때 묻은 타성뿐이다.
이렇듯 사랑은 복잡하게 뒤엉긴 어려운 문제를, 예리한 칼날처럼 우리의 코앞에 들이대고 있는 것이거니와, 저 사람이 좋아하니까 초콜릿을 주자는 어린애 장난 같은 사랑이 아니라 좀 더 현실적인 사랑에 대해, 한비자는 2천 년이나 전에 논급하고 있는데서, 너무나도 로맨틱한 사랑에 현혹된 우리에게 상당히 강렬한 시사를 주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가면
먼저 한비자는 에피소드를 하나 내 세우고 있다.
초나라 장왕(莊王)의 동생 춘신군(春中君)에게 여(余)라는 애첩이 있었다.
춘신군의 본처에서 난 아들을 갑(甲)이라고 불렀다.
여(余)는 춘신군이 그 본처와 이혼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 자기 몸에 상처를 내어 그것을 춘신군에게 보이면서 눈물을 흘리 며 간청했다.
“당신의 첩이 된 것만해도 그지없이 행복한 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 실의 마음에 들고자 하면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게 되고, 당신의 마음에 들고자 하면 정실부인의 마음에 들 수가 없습니다. 저는 원래가 수양이 덜된 사람이라 동시에 두 분의 마음에 들 수 있는 행동은 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 다가 첩인 저로서는 두 분에게 똑 같이 마음에 들게끔 모신다는 것은 무리가 아니겠습니까. 될 수만 있으면 부인의 손에 죽기보다는 차라리 당신의 손에 죽었으면 합니다. 제가 죽고 나서 만약에 다시 총애하는 사람을 곁에 두시게 되면 부탁건대 이런 사정을 살피시어 남의 웃음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춘신군은 이런 첩의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믿고 정실부인과 이혼을 하고 말았다.
여(余)는 또, 갑(甲)을 죽임으로써 제 자식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그래서 자기가 자신의 속옷을 찢은 다음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했다.
“저는 당신의 깊으신 사랑을 받은 지도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갑(甲)으로 서도 그걸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억지로 저를 농락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죽음을 각오하고 저항한 끝에 결국 이렇게 속옷까지 찢기게 되고 말았습니다. 자식으로서 이보다 더한 불행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먼 치사할 정도의 이욕(利慾)과 육욕(肉 慾)의 덩어리가 끈적끈적하게 소용돌이치고 있거니와, 로망의 향기 높은, 아름다워야 할 사랑도 그 그럴싸한 가면을 벗기고 난 현실은 뜻밖에도 이런 것 인지 모른다.
아내라는 것은 남편과 피가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원래가 성격이 다른 전혀 남남인 것이다. 애정이 있는 동안에는 서로 친근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이 없어지면 그 관계는 다시 소원해지고 만다. 속담에도 '그 어미가 사랑을 받으면 그 자식은 안긴다'는 것이 있다. 그러고 보면 그것을 뒤집어 '그 어미가 미움을 받으면 그 자식은 버려진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내는 오십이 되어도 호색(好色)하는 마음은 도무지 쇠퇴하지 않는데 여자는 삼십이 되면 용모가 쇠퇴해지기 시작한다. 용모가 쇠퇴해진 여자가 호색의 마음이 전혀 줄어들지 않는 남편을 섬기려면 그 육신은 경원되며, 그 자식으로 뒤를 잇지 못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의심이 생겨날 것이다. 의심이 의심을 낳는 수도 있겠지만 용모가 쇠퇴해지기 시작한 여자로서는 아무래도 자기 방어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한비자는 그렇게 말하지만, 먹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인간인 이상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다. 거짓말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라이벌을 끌어 내리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현실이란 그리 쉽게 로맨틱한 사랑만을 구가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출처: 웅비의 결단학, 월간 엔터프라이즈, 198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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