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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의 처세훈 (웅비의 결단학)/사랑의 지혜

[한비자]6-2 사랑은 힘을 따른다

by 고전 읽기 2023.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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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힘을 따른다

 

한비자는 다시 피가 이어진 부자간의 사이에 마저 신랄한 시선을 쏟고 있다.

 

『시경소아(小雅)』의 <사간(斯干)>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방바닥에 뉘이고

좋은 옷을 입히며

그 손에 옥()을 쥐어 준다.

...

계집아이가 태어나면

땅바닥에 뉘이고

홋옷을 입힌 다음

그 손에 실꾸리를 쥐어준다

...

 

부모가 그 자식에 대한 경우에도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서로 좋아하고 계집아이가 태어나면 대개는 함부로 다룬다. 똑같이 부모의 애정의 결정(結晶)으로서 태어났는데도 사내는 축복받고 계집애는 사내만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장래의 편의를 생각하고 장기간에 걸친 이익을 계산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부모는 피를 이어받은 내 자식에 대해서까지도 마음 한 구석 에는 공리적인 계산을 감춘 채 상대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부모가 좋은 자식을 원하는 것은, 집안이 가난하면 그 자식이 돈을 벌어 오고 부모가 고생하고 있으면 그 자식이 즐겁게 해주는, 그런 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한비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아마 우리나라 어느 부모 치고, 그 자식이 독립된 인격을 가지고 부모와는 아무런 관련도 갖지 않은 채 제 갈길만 걸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 다. 그 어떤 틀을 억지로 씌우고 싶어 하고 있을 것이다. 내 자식에 대한 애 정에도 스스로의 이해가 깊이 엉클려 있는 것이다.

 

가령 아버지의 애정은 그렇다 하더라도 어머니의 애정은 훨씬 순수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어머니와 자식을 연결하는 것은 사랑 이외는 없다. 자비스런 어머니의 유아(乳兒)에 대한 애정은 그야말로 더 이상의 것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식에게 잘못하는 행동이 있다면 선생에게 부탁해서 고치려 하고, 나쁜 병에 걸리면 의사에게 치료를 받게 할 것이다. 선생에게 부탁하 여 고치지 않으면 얼마 후에 형벌을 받게 될 것이고 의사의 치료를 받지 않으면 죽게 될는지도 모른다.

 

자비스런 어머니는 아무리 그 자식을 사랑하고 있어도, 그 자식을 형벌에서 구해내고 죽음에서 살려내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자식을 살리는 것은 자비스러운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비자는 그렇게 말한다. 물론 선생에게 부탁한다든지 의사에게 데려간다든지 하는 배후에는 자비스러운 어머니의 애정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애정이 교육이나 치료에 직접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도 또한 분명할 것이다.

 

그 자비스런 어머니의 애정에도 그 어떤 틀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해 볼 수도 있지만 그건 또 별도의 일이다.

 

그러나 자비스런 어머니의 애정에 관해서, 다른 견해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그 자식을 사랑하는 정은 아버지의 애정의 두 배나 된다. 그러나 그 자식은 아버지가 시키는 말을 어머니의 그것보다 열 배나 더 잘 듣는다. 관청은 국민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관청에서 시키는 일은 부모의 그것보다 만 배나 더 잘 듣지 않는가. 부모는 애정을 쌓아 올리며, 더구나 시키는 말을 가끔 듣지 않아도 탈이 없는데, 관청은 위엄을 들이대는 만큼 국민은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이다.

 

위엄과 애정과의 차이는 이토록 명백한 것이다. 더구나 부모는 그 자식이 하는 일이 조금이라도 안락하고 유리하기를 바라며, 범죄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지게끔 몸을 처신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국가는 그 국민에 대해 비상시에는 그 생명까지도 던지게 하며, 평화스러울 때에도 죽을힘을 다하여 일할 것을 요구한다. 부모는 두터운 애정으로 그 자식이 안락하고 유리하도록 원하고 있는데도 그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국가는 애정도 없이 국민의 사력을 이용하고 요구하지만 이런 것들은 모두 받아들여진다.

 

이런 식으로 어머니는 애정으로 그 자식을 대하게 되는데, 그렇게하면 그 자식은 대개 못쓰게 된다. 그것은 모든 것에 애정을 미치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애정도 깊지 않으며 회초리로 그 자식을 가르치는데, 그렇게 되면 그 자식은 대개 크게 성공한다. 그것은 엄격으로써 그 자식을 대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비자는 말한다.

 

사랑이란 입에는 달콤하지만 결국엔 그 자식을 못쓰게 만들고 마는, 아편 과도 같은 것인지 모른다.

 

여기 버릇이 나쁜 자식이 있다고 하자. 부모가 아무리 화를 내도 그 자식은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마을사람들이 나무라도 요지부동이다. 선생이나 장로(長老)가 가르치고 깨우쳐주려 해도 태도를 바꾸려 들지 않는다. 부모의 사랑, 마을 사람들의 행동력, 선생과 장로의 지혜라는 3가지 훌륭한 선 ()을 다해도 결국 그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털끝만치도 고치려는 기색이 없다.

 

그러나 경찰관이 직접 나서서 법률에 의해서 악인을 수색하겠다고 나서면 그만 꼼짝 못 하고 마음을 고쳐 먹고 행동도 고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 모의 사랑은 자식을 교육시키는데 충분한 효과를 발휘할 수 없고 아무래도 경찰의 엄벌의 힘을 빌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은 사랑을 받으면 오만해지고 엄격하게 하면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힘을 따른다고나 할 수 있는 것인가. 법을 다스리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들으면 눈물을 흘리면서 좋아할 것 같은 한비자의 말이긴 하지만 그렇듯 힘에 의한 억압이 좋은 일인지 어쩐지, 억압된 에너지가 어디로 향하며 어떤 형태로 사회화될 것인지. 이런 갖가지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겠지만 아뭏든 현실처리라는 면에서 그런 논리의 연장선상에 한비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두가지 들어 보인다.

 


출처: 웅비의 결단학, 월간 엔터프라이즈, 198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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