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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의 처세훈 (웅비의 결단학)/사랑의 지혜

[한비자]6-6 사람을 감동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

by 고전 읽기 2023.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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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감동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


유가(儒家)들이 동질(同質)의 것의 조화 융화를 개인과 조직사이에도 넓혀 나가려고 하고 있는데 대해 한비자는 고군분투, 대립물(對立物)의 통일을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에 관해서 또 한 가지 비슷한 에피소드를 들어보자.


역산(歷山)의 농부가 서로 논의 논두렁을 침범하고 있었다. 그러나 순(舜)이 그곳에 가서 농사를 짓게 되자 1년 만에 논두렁은 정상대로 되돌아갔으며 아무도 침범하려 하지 않았다.


하빈(河濱)의 어부가 서로 하(河)의 어장을 다투고 있었다. 그런데 순이 그곳에 가서 고기잡이를 하자 1년만에 어장을 연장자에게 양보하게 되었다.


동이(東夷)의 도공(陶工)이 만드는 도기는 깨어지기 쉬운 조악품이었다. 그런데 순이 그곳에 가서 도기를 만들자 1년 만에 동이의 도기는 튼튼해졌다.


“농사를 짓는 일, 고기를 잡는 일, 도기를 만드는 일은 순의 직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이 직접 나가서 그런 일을 한 것은 나쁜 점을 고치려고 했기 때문이다. 순은 진정한 박애자(博愛者)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경작을 하며 고생하고 있는 동안에 백성이 그것을 따르게끔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의 덕은 사람을 감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감탄했다.


사랑에 의한 교화의 한계


한비자는 이 순의 사랑에 의해 스스로 이루어지는 교화의 얘기에 대해 어떤 사람의 말을 빌어 이렇게 반론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유자(儒者)에게 물었다.


“그 때 요(堯)는 대체 어디에 있었습니까”


“요는 천자(天子)였다네”


유자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공자가 요를 성인이라고 한 것은 어떤 뜻입니까. 깊은 통찰력을 가진 성인이 위에 있으면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온 세상에 나쁜 짓은 있을 수 없게 할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농부나 어부도 다툴 일이 없을 것이고 도기도 조악품이 아니었을 것이므로 순으로서는 대체 그 사랑으로 백성을 교화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순이 나쁜 점을 고치려 한 것을 보면 요에게 실수가 있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순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해야 한다면 요의 깊은 통찰력은 부정되어야 할 것이며, 요를 성인으로서 칭송했다면 순의 사랑에 의한 교화는 부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양자가 양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초(楚)나라에 모(矛)와 순(盾)을 파는 자가 있었습니다. 방패를 자랑하면서 이 방패의 튼튼하기를 말한다면 어떤 것으로도 이를 뚫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다시 창을 자랑하며 '이 창이 얼마나 예리한고 하면 어떤 것이건 이것으로 꿰뚫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당신의 창(矛)으로 당신의 방패(盾) 를 찌르면 대체로 어떻게 됩니까' 하고 말했읍니다.


방패와 창을 파는 사람은 더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대저 어떤 것으로서도 꿰뚫을 수 없는 방패와 어떤 것이든지 꿰뚫을 수 있는 창과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와 순을 동시에 칭송할 수 없는 것은 마치 이 창과 방패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더구나 순이 나쁜 점을 고치는 데는 1년 걸려 한 가지를 고치고 3년 걸려 3 가지를 고쳤을 뿐입니다. 순의 행위에는 한계가 있고 수명도 언젠가는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악은 그칠 날이 없습니다. 한정이 있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 것에 대처한다고 하면 고칠 있는 악은 극히 적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상벌(賞罰)이야말로 세상사람들을 복종케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기준에 맞는 것에는 상을 주고 기준에 맞지 않는 것에는 벌을 준다’는 법령을 발포(發布)한다면, 그 법령이 이른 아침에 도달하면 저녁때에는 그쳐지고 저녁때 도달하면 다음 날 아침에는 고쳐져서 열흘 동안에 전국 각처에서 잘못이 고쳐질 것입니다.


어째서 1년이나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순은 그렇게 말하여 요를 설득하고 온 세상 사람들을 복종시키려 하지 않고 오히려 제 발로 걸어가서 손수 일을 했습니다. 이 얼마나 책략에 어긋나는 짓입니까. 더군다나 자신의 몸을 괴롭힘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려는 방법은, 요·순과 같은 훌륭한 사람들마저도 쉽게 이룩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권위 있는 지위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교정하려는 방법은 범용스런 군주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세상을 다스리고자 함에 있어서 범용한 군주라도 쉽게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버리고 요. 순으로서도 실행하기 어려운 방법을 주장한다는 것은 잘 다스리는 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출처: 웅비의 결단학, 월간 엔터프라이즈, 198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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