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에서의 한비자
한비자가 설파한 모순(矛盾)의 설도, 개인적인 사랑을 바탕으로 한 감화로 조직전체의 통일을 도모하려는 시도가 힘만 들고 효과가 적은 방법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크고 풍부하다. 물론 한 조각의 법령에 의해서 악이 곧 없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을 사랑하고 그 마음속에까지 들어가서 감화시킨다는 방법은 그 자체로서는 대단히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조직의 운영은 곧 벽에 부딪치고 말 것이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개인적인 심정을 떨어 버린 추상적인 규율이야말로 추상적인 조직의 운영에는 한층 더 효과적이라고 하는 하나의 비유로서 그것은 설파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비능률적인 방법밖에 취할 수 없었던 순이 어째서 요와 나란히 칭송받는 성제가 될 수 있었는가.
순의 아버지 고수(瞽叟)는 장님이었다. 순의 어머니가 죽자 고수는 다시 아내를 맞아 상(象)이라는 아이를 낳았다. 상은 오만했다. 고수는 후처의 아들을 사랑하여 가끔 순을 죽이려는 생각을 했다.
그럴 때는, 순은 몸을 피하여 고수앞에 나타나지 않기로 했다. 조그만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자진해서 벌을 받았다. 아버지와 계모와 동생에게 잘해주며 나날이 몸가짐을 삼가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했다.
순은 기주(冀州)사람이었다. 역사(歷山)에서 농사를 짓고, 뇌택(雷澤)에서 고기를 잡고, 하빈(河濱)에서 도기를 만들고, 수구(壽丘)에서 집기를 만들면서 때때로 부하(負夏)까지 장사도 하러 다녔다. 아버지 고수는 완고하고 어머니는 잔소리가 많았으며, 동생인 상(象)은 오만하여 다들 순을 죽이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순은 거역하지 않고 아들로서의 도리에서 벗어나는 일도 없었고 동생도 잘 돌보아 주었다. 그러므로 죽이고 싶어도 죽일 이유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찾기만 하면 언제든지 순은 그 곁에 대기하여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순은 나이 20세 때 그 효도가 유명해졌다. 30세 때, 요제(堯帝)는 후계자를 찾고 있었는데 사악(四岳)이 한결 같이 순을 추천하면서, 그러면 아무 염려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요는 두 딸을 순에게 시집보내어 그 가정 내에서의 사생활을 관찰케 하고 그의 아홉 명의 아들을 동시에 행동케 하여 그의 사회생활에서의 대응을 살피게 했다.
순은 위예(酒訥)에 살면서 사생활을 더욱 신중히 했다. 요의 두 딸도 그 높은 신분을 들먹이는 일 없이 순의 가족에게 정성을 다했으며 부인으로서의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 아홉 명의 아들들도 순과의 우정을 점점 깊이 해나갔다.
순이 역산에서 농사를 지으매 역산의 사람들은 다투고 있던 논두렁을 서로 양보하게 되었다. 뇌택에서 물고기를 잡자 빼앗고 있던 어장을 서로 양보하게 되었다. 하빈에서 도기를 만들자 하빈의 도기는 깨지기 쉬운 나쁜 도자기가 아니게 되었다.
순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1년에 마을이 되고, 2년만에 시가지가 되고 3년 만에 도시가 되었다. 그래서 요는 순에게 갈포(葛布) 의복과 거문고를 주고 곡식의 창고를 만들어 소와 양을 주었다.
그럼에도 고수는 순을 죽이려고 했다. 순에게 창고 위에 올라가서 벽을 칠하게 한 다음 밑에서 불을 질러 창고를 태워버렸다. 순은 두 삿갓을 이용하여 새의 날개처럼 치면서 뛰어내려 겨우 죽음을 면할 수가 있었다.
얼마 후에 또 고수는 순에게 샘을 파도록 했다. 순은 샘을 팠으나 옆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도 만들었다. 순이 샘 속 깊숙이 들어가는 것을 확인 한 고수는 상(象)과 함께 흙을 끌어 부어 샘을 메꾸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순은 옆구멍으로 빠져나갔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고수와 상은 순이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기쁨에 날뛰었다.
“원래 이 계획을 생각한 것은 나다"
상은 부모와 셋이서 순의 재산을 나누려고 할 때 상은 다시 말했다.
“부인이었던 요의 두 딸과 거문고는 내 차지다. 소와 양과 곡식과 창고는 아버지와 어머니께 드리겠다.
이리하여 상은 순의 집에 머물면서 순의 거문고를 탔다. 그러자 순이 돌아와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상은 깜짝 놀라서 어색한듯이 말했다.
“형님 생각을 하면서 기분이 울적했던 참입니다”
"음 그럴줄 알았다"
순은 그렇게 말하고 변함없이 고수를 받들고 동생을 사랑했으며 점점 더 몸을 근신했다.
아버지를 추방하고 동생을 죽이다
『사기』는 역사적 사실로서 순에 대한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순이 제왕의 자리에 앉자 천자의 기를 내세우고 아버지와 고수를 찾아가서 인사를 했으며 대단히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아들로서의 도리를 다했다. 동생인 상을 제후(諸侯)에 봉했다'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그러나 한비자는 ‘고수는 순의 아버지였지만 순은 그를 추방했다. 상은 순의 동생이었지만 순은 그를 죽였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고고학의 발달로 현재 은(殷)은 역사적 시대로서 확인되고 있다. 과학의 발달은 얼마 안가서 은나라보다 하나 앞 왕조라고 하는 하(夏)를 역사적 시대로서 확인하게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왕조의 시조라고 알려져 있는 우(禹)임금의, 그 전의 황제였다고 하는 순까지를, 역사적 인물로 끌어넣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역사적 시대를 훨씬 거슬러 올라가는 그 시기에 순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존재하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에, 순을 역사적 인물로서 기재할 때 유교적인 교의(敎義)에 맞추어서 그 어떤 윤색을 했거나 아니면 유교적으로 합리화된 유가들의 자료만을 적극적으로 채용한 것이 틀림없다.
순은 말할 것도 없이 제국을 평정하고 주변의 개척을 위해 노력한 영웅신 (英雄神)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비자가 적었듯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자에 대해서는 끝까지 잔혹하게 보복을 가하여 복수하는 일이야말로 거칠게 날뛰는 신인 영웅신으로서는 걸맞지 않겠는가.
사마천이 취하지 않았거나 혹은 사마천의 시대에는 이미 없어져버린 순 신화의 단편이 한비자의 무렵에는 아직 남아 있었을 것이 틀림 없다. 그리고 거기까지는 한비자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 순 신화가 품고 있는 뜻은 잔혹한 복수, 즉 비애(非愛)를 매개로 하여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 실현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개개의 인간에게 착 달라붙은, 그러나 어딘가 의심스러운 개별 구체적인 순의 사랑이 고수를 추방하고 상을 죽인다는 잔혹한 비애(非愛)를 계기로 하여 보편적인 사랑으로 전화되어 순은 성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추상의 세계에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그 보편적인 사랑이야말로 필요불가결한 것임에 틀림없다.
출처: 웅비의 결단학, 월간 엔터프라이즈, 198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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