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가 외치는 왕도정치란 인류에게는 영원한 이상인지도 모른다. 맹자가 살았던 2천 수백 년 전의 중국은 물론, 오늘날에도 그 이상을 실현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러나 맹자는 왕도정치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하며 노력만 아끼지 않는다면 그 본성을 전면적으로 꽃 피울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성선설이라고 하는사고방식,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해도 그대로 방치해 두면 악으로 향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격을 도야하는 끈질긴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만 하면 원래부터 선인 소질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남의 위에 있는 자가 자신의 본성을 자각하고 덕을 몸에 익혀 그것을 다른 남에게 미치게 한다. 모든 사람들의 본성은 선이므로 윗사람의 덕에 감화되어 스스로 선으로 향한다. 이와 같은 성선설에 입각하여 왕도정치의 주장이 유도된 것이다.
맹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옛날의 성인이 피가 통하는 정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피가 통하는 정치를 한다면 천하는 쉽게 다스려질 것이다.
어린애가 걸음마 걸음으로 우물가에 다가가는 것을 보았다고 하자. 누구나 깜짝놀라 가엾어라 도와주어야지 하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린이를 구한 다음 부모와 사귀려는 저의가 있어서가 아니다. 마을 사람이나 친구로부터 칭찬을 들으려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하지 않으면 비난을 받기 때문도 아니다.
이렇게 보면 연민의 정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추고 있다. 나아가 악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서로 양보하는 마음, 선악을 판단하는 마음도 인간이라 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가엾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인이 싹트는 것이다. 서로 양보하는 마음은 예(禮)가 싹트는 것이다. 선악을 판단하는 마음은 지(智)가 싹트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4개의 수족을 가지고 있듯이 이 네 가지의 싹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는 인, 의, 예, 지의 덕과는 관계가 없다고 단정해 버린다는 것은 자기를 손상케 하는 짓이다. 군주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짓을 한다면 군주를 손상시키는 길이 된다.
자기가 갖추고 있는 이 네가지 싹을 키우고자 노력한다면 불길이 타오르고, 샘이 솟아오르듯 한없이 커질 수 있다. 이것을 키워가면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다. 그러나 키우려는 마음이 없으면 부모 봉양마저 할 수도 없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풍요로운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키우려는 노력만 아끼지 않는다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그것을 우산(牛山)의 나무와 비교하며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저 우산도 전에는 나무들이 아름답게 무성해 있었다. 그런데 도읍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나무는 도끼에 잘리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아름다움도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비록 잘리기는 했지만 나무에는 끊임없이 생장하는 힘이 작용하고 있고 비와 이슬도 이를 적셔준다. 그러니 새싹이 아니 나올 수가 없다. 한데 또다시 소와 양을 놓아 기르니 마침내 그와 같은 민둥산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 민둥산을 보고 이 산에는 원래 나무가 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실은 그것이 이 산의 본성은 결코 아니었다.
사람에게도 결코 인의의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없어지는 것은, 우산의 나무들이 도끼에 잘린 것과 마찬가지다. 매일같이 잘려 나가고 보니 인간의 아름다움도 소용이 없어져 버린다"
벌채만 하고 나무를 심으려 하지 않으면 어떤 산이건 민둥산이 되고 만다. 산에는 본시부터 나무를 키우려는 잠재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소중히 해주면 검푸른 나무가 자란다.
사람도 그와 같아서 원래 풍부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잘 발전시켜 주기만 하면 인, 의, 예, 지의 마음을 가진 훌륭한 사람으로 자란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듯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훌륭한 정치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성에 대한 깊은 신뢰 속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우리가 오늘날 살아가고 있는 이익 추구의 사회나 인간 불신의 사회에 대하여 날카로운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질식할 것 같은 그 이익 추구의 사회에 있어서, 시원스러운 일진의 바람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
출처: 난세의 인간학, 월간 엔터프라이즈, 198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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