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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전과 현대 처세학 (난세의 인간학)/맹자(孟子)

4. [맹자] 정적인 인간의 경지

by 고전 읽기 2022.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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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가 주장하는 지도자의 조건 중에서, 또 하나 없어서는 안 될 것은 부동심(不動心)이란 것이다. 부동심이란 외계의 사물과 정세의 변화에도 전혀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경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맹자만이 아니라, 중국 고전에는 종종 군자(君子)라는 말이 나온다. 이 ‘군자’란 앵글로색슨 계의 말로 표현하자면 젠틀맨에 해당되며 사회의 지도층, 이상적인 인간상을 뜻한다. 이 '군자'에 대해서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군자가 일반인과 다른 것은 자기의 마음을 반성하는 점에 있다. 가령 도리에 벗어난 일을 당해도 군자는 반드시 자신을 반성한다.

“내가 인이 부족한 탓이려니. 예의가 없었을 테지. 그렇지 않으면 왜 이렇게 된단 말인가"

반성해 보고 자신이 인과 예에 합당했는데도, 상대가 비도(非道)를 고치지 않으면, 군자는 다시 자신을 반성한다.

“분명히 성실성이 부족했을 거야”

이렇게 반성해 보아도 역시 자신은 성실했고 상대가 비도를 고치지 않으면 군자는 그제야 이렇게 생각한다.

“상대는 무법자다. 그 꼬락서니가 짐승과 어디 다른데가 있단 말인가. 짐승을 비난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기에 군자에게는 일생을 통하여 내면적인 고뇌는 있을지라도 외부에 의해 일어나는 마음의 동요는 있을 수 없다. 그러면 군자의 고뇌란 무엇인가. 고대의 제왕 순(舜)은 성인이지만 그 순도 역시 인간이고 자신도 인간이다. 그러나 순은 천하에 모범을 보였고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너무도 평범한 속인(俗人)에 지나지 않는다는 고민이다. 이것은 마땅히 고민할 만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순을 본따는 것 그것밖에 없다.

군자에는 마음의 동요가 없다. 인에 어긋나는 일은 행하지 않고, 예를 벗어난 짓은 행하지 않으므로 비록 외부에서 무엇이 밀어닥치건 동요할 수는 없다.

군자가 어떠한 사태에 처해도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것은 수양을 쌓고 인, 의, 예의 덕을 확고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맹자란 사람은 그것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찍부터 자기 자신도 그런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었다. 어느 때 공손축(公孫丑)이란 제자가,

“선생님 같으신 분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서 마음껏 수완을 펼쳤다고 하십시다. 그렇게 되면 제나라가 천하의 왕자로 부상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와 같은 중책을 맡으시면 역시 동요되시지 않을는지요”
하고 물었다. 맹자는

“아닐쎄, 나는 40이 넘으면서부터 무슨 일에도 동요되지 않게 되었다” 하고 대답했다.

'40이 되어서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다'는 말은 공자의 ‘‘40에 당혹하지 않는다 〔四十而不惑)'라고 말한 것과 같은 여운을 가지고 있다.

어째서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되었는가, 맹자는 '아지언(我知言)’과 ‘아선양오(我善養吾)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첫째의 '아지언'이란 '남의 이야기를 이해한다, 판단하다'라는 뜻이다. 그것
이 어떻게 해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과 연결되는 것인가. 맹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타당하지 않은 얘기를 들으면 상대가 어느 쪽을 모르는가를 판단한다. 허망한 얘기를 들으면 상대가 어디에 현혹되었는가를 판단한다. 간사한 얘기를 들으면 상대가 어디에서 도리에 어긋났는가를 판단한다. 핑계대는 얘기를 들으면 어디에서 막혔는가를 판단한다”

즉 이쪽이 확실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런 정보에 휘말리지도 않고 마음이 동요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둘째, 맹자가 동요되지 않기 위한 이유로 들고 있는 것이 ‘호연지기’이다. 이에 대해 맹자는 ‘말하기 어렵다’는 전제 아래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더 없이 광대(廣大)하고, 더 없이 강건한 것이다. 나는 항상 올바른 일을 행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그것을 키워가면 마침내 그 기(氣)가 하늘과 땅 사이에 충만한다.

그러나 그것은 도와 의가 있으므로 해서 비로소 존재하고, 그것이 없으면 곧 없어지고 만다. 의를 반복하는 사이에 스스로 얻어지는 것이다. 가끔 의를 행했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또 마음에 꺼림칙한 것이 있어도 없어지고 만다"

이 설명만으로는 약간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요컨대 ‘호연지기’란 나는 올바른 일을 행하고 있다는 확고한 신념의 뒷받침이 있어야 비로소 나온다는 뜻이다.

그럼 ‘호연지기’를 키우려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인가. ‘그것을 염두에서 떠나게 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성급하게 재촉하려 해도 안된다”라고 맹자는 전제한 다음 유명한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송(宋)나라의 어느 농민은 묘종이 빨리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 묘를 잡아당기고 말았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하는 말이, 아 오늘은 지쳤구나, 묘종을 잡아 뽑느라고 지쳤어.


아들이 황급히 밭으로 나가보니 묘종이 이미 시들어 죽고 말았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이 적지 않다.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이 무익하다는 사람은 마치 묘종을 잡아당기는 사람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무익할 뿐 아니라 해롭기까지 한 것이다"

'호연지기'를 기르고 동요되지 않는 마음을 자기의 것으로 하려면, 끊임없이 착실하고 끊임없는 수양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난세의 인간학, 월간 엔터프라이즈, 198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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