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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의 처세훈 (웅비의 결단학)/진시황과 한비자

[한비자] 0-2.전국시대에서 살아남는 길

by 고전 읽기 2023.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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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에서 살아남는 길

 

한비자에 대한 사기 기록은 이것이 전부이며 너무 간단하다. 그러나, 그 뒤의 연구에 의하면 한비자는 기원전 280년 경에 태어나 기원전 233년에 죽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한비자가 산 시대는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 진 시황제에 의한 중국 통일 직전이었다.

 

전국시대란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뒤를 이어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할 때까지 (BC402~BC221)의 약 2백 년을 말한다.

 

전설에 의하면, 중국 최초의 제왕은 황제(黃帝)였다. 이 황제의 뒤를 이어 요(), (), ()의 세 제왕이 계속 다스렸다. 우에 의하여 하왕조(夏王朝)가 세워지고, 하왕조 다음에 은왕조(殷王朝), 그리고 은왕조 다음에 주왕조(周王朝)가 들어섰다. 이 왕조들 중에서 현재 고고학적(考古學的)으로 그 존재가 확인된 것은 은왕조 이후이다. 당시의 중국 문명은 청동기(靑銅器) 시대의 단계를 겪고 있었고 이미 한자(漢字)의 원형문자(原形文字)가 사용되고 있었다.

 

기원전 13세기 경부터 은나라는 황하의 중류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씨족끼리 이 마을을 형성하고 몇 개의 마을이 모여 연합체를 형성하였다. 은나라도 이 연합체의 하나로 다른 연합체를 누르고 맹주(盟主)의 자리를 굳힌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와 같이 은나라는 연합체의 맹주였다. 그러나 기원전 12세기 경이 되자 이들 연합체 중에서 서쪽에 있던 주()의 세력이 커지면서 주왕(紂王)을 끝으로 은나라는 맹주의 위치에서 사라지고, 주가 새로운 맹주로 등장했다.

 

그러나 주의 대()가 되어서도 이 연합체를 이끄는 통치방식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주나라는 왕족이나 공신들을 각지에 배속하고, 전부터 있던 제국(諸國)은 다시 그 지위를 인정하며 통치를 계속했다.

 

주왕조는 4세기에 걸쳐 지배자의 위치를 지켰다. 그러나 차츰 혈연관계가 희박해지면서 내부의 결속이 해이해지고 제국(諸國)이 독립성을 띠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기원전 8세기 경 서북쪽에 있는 유목민 견융(犬戎)의 침공을 받았다. 견융이 주의 수도 호경(鎬京)을 공격했을 때 제국들은 주나라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주는 도읍을 동쪽인 낙읍(洛邑)으로 옮기고 왕조의 명목 만은 유지했지만 이미 제국을 통합시킬 힘은 없었다. 이렇게 하여 제국들은 사실상 독립국으로 분립해 나갔다.

 

이때부터 7 웅이 각축전을 보이는 전국시대까지를 중국의 역사에서는 춘추시대(春秋時代)라고 한다. 춘추전국시대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합한 이름이다. 춘추시대는 기원전 5세기 경까지의 약 3백 년을 가리키며 공자(孔子)가 지은 춘추(春秋)는 역사서에서 따 온 이름이고, 전국시대는 춘추시대가 끝난 뒤부터 약 2백 년 동안의 제국의 항쟁이 한층 격화된 시대로, 한(漢)나라 유방의 「전국책(戰國策)」이라는 역사에서 따 온 명칭이다.

 

주(周)나라 왕실은 이미 춘추시대부터 쇠약하였다. 그러나 이 춘추시대에는 170여 개에 달하는 제후(諸侯)의 나라들이 있었고 이 제후의 나라들을 이끄는 패자(覇者)들이 차례로 나타나 주나라 왕실을 받들며 명목상의 질서는 유지하고 있었다.

 

이 춘추시대의 중반부터 쇠()로 된 농구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전국시대에 들어가서는 널리 보급되었다. 그리고 대규모의 관개공사(灌槪工事)가 행하여지고 농업생산이 급격하게 향상되었다. 따라서 상공업이 발달하고화폐가 유통되고 토지가 매매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경(), 대부(大夫)등 가신(家臣)들에게 분배된 영지에도 변화가 일어나서 씨족단위의 공동체가 이루어지고 가족단위의 일종의 자영농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배경하에 전국시대로 들어서면서 주왕실의 권위를 인정하는 세력이 없어지고 약육강식의 전란시대가 되었다. 군주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앞을 다투어 실현하려고 했다. 그들은 자영농민으로 정착된 백성들을 유사시에 병사로 징집하고 또 그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여 나라의 재정을 튼튼히 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자기 나라의 부국강병책을 도모하면서 기회만 있으면 작은 나라를 공격하여 영토를 넓혀 나갔다.

 


출처: 웅비의 결단학, 월간 엔터프라이즈, 198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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