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국강병책이란 무엇인가
사마천의 『사기』에 기술된 것처럼, 한비자는 기원전 3세기 초 한(韓)나라 왕, 안(安)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신분은 서공자(庶公子)였다. 서공자란 공자(왕의 아들) 중에서도 어머니의 신분이 낮은 후궁의 소생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한비자는 왕족(王族)의 일원이지만 신분이 낮은 위치였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한나라는 전국칠웅 중에서 가장 국토가 좁은 나라였다. 지리적으로 중국 전체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 발전할 수 있는 미개지가 없었으며 인접한 나라들로부터 압박을 받는 존재였다.
특히 한나라 서쪽에 있던 진나라는 최대의 위협적 존재였다.
진나라는 기원전 4세기에 상앙(商快)의 법치주의를 채용하여 국정의 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에 급속하게 강해지고 다른 6개국을 누르고 중국통일을 도모하게 되었다.
한비자가 태어난 한나라도 소후(昭) 때에는 신불해(申不害)를 등용하여 정치개혁을 단행하고 국력을 충실히 했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쇠퇴의 길을 걸어 한비자의 시대에는 이미 한나라의 운명은 이 강대한 진나라 앞에 풍전등화와 같았다. 젊은 공자 한비자는 이와 같은 조국의 현상을 걱정하여 이미 진나라와 한나라에서 정치개혁을 단행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한 상앙이나 신불해와 같은 개혁자들의 사상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한비자는 당시의 대표적 학자였던 순자(荀子)에게서 공부를 했다. 그 때의 순자의 제자 중에는 뒤에 진나라의 재상이 되어 한비자를 죽인 이사(李斯)도 끼어 있었다. 이와 같은 이사도 한비자의 재능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한비자는 순자에게 배우고 여러 학파의 설을 받아들이고 비판하여 부국강병에 도움이 되는 독자적인 학문을 완성했다.
그러나 힘들여서 부국강병을 성취시킬 수 있는 학문을 완성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정치에 실제로 적용하기 위하여는 우선 자기 나라 왕에게 인정을 받아야 했다. 그러기 위하여는 왕 앞에서 유창한 능변으로 그것을 설명해야 했다. 그러나 한비자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그는 말을 더듬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글로 써서 자기 의견을 왕에게 전달했으며, 그의 글은 너무 날카로웠다.
한비자의 이 글들을 모은 것이 곧 한비자(韓非子) 55편이다. 사람 이름이 그대로 저서의 이름이 된 것이다.
출처: 웅비의 결단학, 월간 엔터프라이즈, 198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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