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한 일에 끌려 다니지 말라
예양(豫讓)은 진(晋)나라 사람이었다. 원래는 진나라의 대신 범(范)씨와 중행(中行)씨 아래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전혀 햇볕을 보지 못했었다. 그러다 같은 진나라 대신인 지백(智伯) 밑에서 일을 하게 되었을 때 지백은 예양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여 융숭한 대우를 해 주었다.
얼마 후에 지백은 조양자(趙子)와 싸우게 되었는데, 조양자는 한 (韓)·위(魏)의 지원을 받아 지백을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3등분 해 버리고 말았다. 더구나 조양자는 항상 지백을 원수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지백의 두개골에 옻칠을 하여 수병(浅瓶, 병자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용기)을 만들었다.
예양은 산속으로 도망쳤다.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고, 여자는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고 한다. 지백은 나를 융숭히 대접해 주었다. 나는 결단코 지백을 위해 원수를 갚은 다음에 죽겠다. 저 세상에서 지백에게 보고할 수 있다면 내 영혼에 부끄러울 바가 없다.'라고 결심하자 성명을 바꾸고 죄인이 되어 조양자의 궁전공사장에 인부로 숨어들었다. 그리하여 변소의 벽을 바르면서 단도를 감추고는 조양자를 찌를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때마침 조양자가 변소에 들어가려 했는데 어쩐지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래서 변소를 바르고 있는 죄인을 붙잡아 생각해 보니 예양이었다. 더구나 단도를 감추고 있으면서 지백의 원수를 갚으려 했다는 것이다. 측근의 사람들은 즉시 죽여버리려 했으나 조양자는 달랐다.
“의인(義人)이로다. 내가 조심해서 해를 피하면 그것으로 되는 일이니 죽 일 것 없다. 지백은 망하여 그의 자손도 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난날의 주 인을 위해 원수를 갚으려 하는 것은 의리를 숭상하는 훌륭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면서 석방해 주었다. 예양은 그대로 돌아갔으나 얼마 후에 온몸에 옻칠을 하고 문둥병자와 같은 모습을 꾸민 다음 숯을 먹고 목소리를 변질시키는 등 얼핏 보기에는 아무도 알아볼 수 없게끔 변장하여 저자로 나가 거지행세를 했다.
아내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친구에게 갔더니, 친구는 그를 알아보았다.
"자네, 예양이 아닌가."
“그렇다네.”
예양이 그렇게 대답하자 그 친구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자네만 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예물을 받들어 조양자에게 찾아간다면 조양자는 틀림없이 자네를 융숭하게 대우하면서 가까이에 둘 것이네. 그런 다음 자네는 자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자네는 자네가 마음먹고 있는 일을 해 낼 수 있을 것이고 일도 훨씬 수월하게 끝내지 않겠는가. 어째서 그런 식으로 자기 일신을 학대하면서까지 일부러 어려운 길을 택하는 것인가.”
“예물을 갖다 바치고 그의 밑에서 일하면서 그를 죽이려 한다면, 즉 두 마음을 품고 주군을 섬기는 셈이 아닌가. 분명히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하려는 것은 후세의 사람들이 두 마음을 품고 주군을 받들려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게 하려 함일세.” 이렇게 말하면서 예양은 발길을 돌렸다.
얼마 후에 조양자가 외출을 했다. 예양은 조양자가 지나갈 예정인 다리 밑에서 몸을 숨기고 기다리고 있었다. 조양자가 다리 끝에 다가오자 말이 무엇에 놀랐는지 앞다리를 치켜들고 걸음을 멈추었다.
“분명, 예양임이 틀림없으렷다.”
조양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주위를 뒤져보게 했다. 과연 예양이었다. 조양자는 예양을 문초했다.
“너는 옛날 범씨와 중행씨를 섬기지 않았느냐. 그 범씨나 중행씨를 지백이 멸망시켰는데도 너는 범씨나 중행씨를 위해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지백을 섬기게까지 되고 말았다. 그 지백도 지금은 이미 죽고 없다. 그런데도 너는, 하필 이번에는 어째서 이토록이나 고집스럽게 나 의 목숨을 노린단 말이냐."
“나는 범씨와 중행씨를 섬겼지만 범씨나 중행씨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나를 대우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해주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백은 국사(國士)로 나를 대우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국사로서 보답해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양이 이렇게 대답하자 조양자는 한숨을 짓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아, 그대가 지백을 위해 충성을 했다는 그 명예는 이로써 충분할 것이다. 거기다가 나로서도 그대를 용서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각오하라. 나도 더는 용서할 수 없다.”
조양자는 호위군사들로 하여금 예양을 잡아들이도록 했다. 그러자 예양이 말했다.
“명군(明君)은 사람의 아름다운 점을 감추지 않고, 충신에게는 명예를 위해 죽는다는 의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먼저번에는 관용으로써 저를 용서해 주었읍니다만 천하의 사람들은 그 일로 해서 한결 같이 귀군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물론 나로서도 용서를 받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바라건대 귀군의 의복을 나에게 벗어주시어 그것을 찌르게 함으로써 나의 소원을 풀게 해 주신다면 죽어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꼭 그렇게 해 달라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마음만 살펴주신다면 그것으로도 족하겠습니다.”
조양자는 그 절개에 감동하여 신하로 하여금 옷을 가져다주도록 했다. 예양은 칼을 뽑아 몸을 솟구쳐 그 옷을 세 번 찔렀다.
“나는 이로써 지하에 있는 지백을 만나 뵈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칼을 가슴에 찌르고 자살했다. 그 얘기를 들은 조나라의 지사(志士)들은 예양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사기 <검객열전〉에 나오는 얘기다. 그 절개야말로 훌륭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보답방법은 그야말로 이러해야만 할 것이 다. 심금을 울리는 감동적인 얘기다. 어쩌면 무의미한 일에 목숨을 걸고, 더구나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 채 죽어가는 그러한 무상성(無償性)에 감동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익 없는 명예
그러나 한비자는 말한다.
바로 그 예양이 지백의 신하가 되었다. 그 받드는 모습을 보면 위로는 주군을 설득하여 법술(法術), 규준(規準)의 중요함을 이해시켜 덮쳐오는 재난을 피하게도 하지 못했을뿐더러, 아래로는 인민 대중을 지도·관리하여 그 국가를 안태 하게 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조양자가 지백을 죽이자 예양은 스스로 그 살갗을 검게 칠하고 코를 깎아 얼굴을 변형시킨 다음, 지백을 위해 조양자에게 원수를 갚으려 했다.
분명히 얼굴을 짓이겨 살신으로 주군을 위해 충성을 다했다는 명예는 있을는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지백에게는 털끝만큼도 이익이 없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세상의 군주라는 것은 그것을 충의(忠義)라고 하면서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분명히 한비자가 말하듯이 국사라면 국사답게, 생전에 지백을 잘 보좌하여 조양자에게 망하지 않게끔 훌륭한 나라를 만들었어야 했을 것이다. 혹시 지백을 위해 조양자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었다 하더라도 지백이 다시 살아날 수는 없는 일이다.
도대체 원수를 갚는다는 행위 자체가 아무런 효용도 없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옷을 찌르면서 원수를 대신 갚는다는데 이르러서는 하나의 유머로서 혹은 의미전환(意味轉換)으로서 별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원수를 갚는다는 면에서는 자기 위안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죽어서 열매가 맺는 것도 아닌데' 하는 말이 있듯이 명예라는 것은 생명과 바꿀 만큼 쓸모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비자는 다음에 한 가지 에피소드를 얘기한다.
출처: 웅비의 결단학, 월간 엔터프라이즈, 1986년 12월
'한비자의 처세훈 (웅비의 결단학) > 실리를 얻는 지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비자]5-5 실용 가치가 있는 학문과 예술 (0) | 2023.04.14 |
---|---|
[한비자]5-4 명백락의 제자 교육과 처세술 (0) | 2023.04.13 |
[한비자]5-2 효용의 시조 (0) | 2023.04.11 |
[한비자]5-1 미사여구가 전부는 아니다 (0) | 2023.04.10 |
[한비자]5-0 실리를 얻는 지혜 (0) | 2023.04.09 |